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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잉글리드 버그만을 거절했던 작가, 로버트 카파
작성자 싸인큐 (ip:)
  • 평점 0점  
  • 작성일 2007-09-15 16: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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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회수 754
 
 

"만약 당신의 사진이 좋지않다면, 그건 당신이 충분히 다가서지 않았기때문이다" - Robert Capa.

 

글리드 버그만..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카사블랑카'등..

 청순하고 우아한 미모로 전세계 남성들의 연인이었던 스웨덴 출신 여배우.

그런 그녀가 청혼했다가 거절당한 사진작가가 있었다.

당대 최고의 여배우를 거절한 사진작가는 과연 누구였을까...

 

<세기의 연인, 잉글리드 버그만>

 

 

역시 사진에 문외한이지만, 아무리 사진에 관심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라이언일병 구하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씬을 기억할 것이다. 포탄과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을 끊임없이 흔들리는 카메라 앵글이 실감을 더해준다. 순간 구토가 일정도의 어질함을 느끼지만, 동시에 깨닫게 되는 것이 있다. 저 씬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역사속 실제장면은, 지금 내 시각을 흔드는 한낱 영화스크린이 주는 울렁거림과는 비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비로소 편안한 쇼파에 기대어 영화를 관람하는 나는, 어느덧 상륙부대 한 병사의 공포에 몰입하도록 만든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그 씬의 모티브라고 얘기했던, 그리고 세상을 놀라게 했던 사진중의 하나로 꼽는 사진의 작가, 로버트 카파다.

 

 

 

<오마하해변 상륙작전,  로버트 카파 ⓒ Cornell Capa>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로버트 카파는 제일 첫번째 상륙함에 승선했기에 뒤에 오는 병사의 얼굴을 촬영할 수 있었다. 이때 상륙했던 병사들의 90%인 약 2,000명이 이날 모래밭 해변에 닿기도 전에 전사했다고 한다. 이 사진은 촛점이 맞지않아 심하게 흔들렸는데, 오히려 그것이 상륙당시의 급박한 전투상황과 더불어 ,생사를 눈앞에서 맞닥드리는 사진작가의 인간적인 두려움이 잘 표현된 것으로 얘기되었다.

당시 저명한 잡지인 <라이프>는 이 사진을 두고 "카파의 손은 살짝 떨리고 있었다 (slightly out of focus)" 라는 캡션을 달았다.

 

 

 

버트 카파는 화가 피카소, 대문호 헤밍웨이, 배우 게리쿠퍼, 그리고 노벨문학상과 퓰리처상 수상자인 존 스타인벡등과 절친하게 지냈다. 특히 피카소와 헤밍웨이와는 호형호제할 정도로(영어에는 표현이 없겠지만^^) 아주 절친했다고 한다.

혹시 아래 사진을 본적이 있는가?

얼핏보면 젊은 귀부인이 해변에 산책을 나오는데, 뒤에 늙은 하인이 비치파라솔을 받쳐주고 있는 것같다.

 

 

<로버트 카파, ⓒ Cornell Capa>

 

 

 

뒤의 늙은 하인이 거장 피카소. 앞의 귀부인^^이 그의 젊은 아내 프랑스와즈 질로다. 뒤의 미끈한 총각은 피카소 조카.

 

이외에도 카파의 사진첩속에는 헤밍웨이등 다른 유명인사들의 소탈한 일상사나 익살스러운 모습등이 많이 포착되어 있다.

 

파는 헝가리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불과 17살나이에 당시 헝가리 파시스트정권을 떠나 망명길에 오르게 된다.

베를린에서 언론경험을 쌓기위해 암실조수로 입사하게 되는데, 당시 스탈린과의 파워게임에서 밀리고 추방당한 러시아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를, 일꾼으로 가장해 근접촬영하면서 매체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지만 그가 본격적으로 세상에 이름을 알리게 된건 그 유명한 'Falling Soldier 쓰러지는 병사'의 사진이다.

이당시 스페인은 노동자,농민이 주축이 된 공화전선이 선거에서 승리했는데, 이에 프랑코장군을 중심으로 한 군부가 선거무효를 주장하고 군부쿠데타를 일으켰다. 스페인 내전이었다. 이들 군부의 뒤에는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독일, 이태리의 지원이 있었고, 아울러 영국과 프랑스는 무관심했다. 이에 전세계 수많은 젊은이들이 민병대로 지원했는데, 여기에는 잘 알다시피 헤밍웨이, 조지오웰, 피카소, 앙드레말로등 당시 자유민주주의를 사랑하고 파시즘에 반대하는 젊은이들이 스페인전장으로 몰려들었다. 카파도 물론 애인 타로와 함께 전선에 동참했다.

 

참호에서 뛰쳐나오다가 군부의 기관총을 맞고 전사하는 병사의 모습..

훗날 진위여부논쟁을 불러일으킬만큼 찰나를 예리하게 포착한 작품이었지만, 그보다는 드넓은 초원에서 마치 순교자가 두팔을 벌리고 장엄한 죽음을 맞이하는 듯한 이 한장의 사진은, 당시 스페인내전의 참상을 알리는 불후의 명작이 되었다.

 

< 피카소의 '게르니카',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와 함께 스페인내전을 담은 불후의 명작, '쓰러지는 병사'.

로버트 카파 ⓒ Cornell Capa>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카파는 다시 전장으로 향한다. 당초 라이프지에서 미국내 취재를 맡기자 카파는 퇴직하겠다고 위협(?)하며, 유럽의 전장으로 보내줄것을 요구했다. 유럽에서 그는 수많은 전쟁의 비극을 목도하고 이를 세상에 알렸으며, 세계는 카파의 사진을 통해 전쟁의 참화를 실감할 수 있었다. 카파는 다른 종군기자처럼 안전지대에서 머물지 않았다. 그는 " 종군 사진기자들은 군인들보다 술을 더 많이, 아가씨들을 더 많이, 자유를 더 많이 갖게 되지만, 안전한 곳을 촬영하여 비겁자로써 목숨을 구하는 것은 나에게는 고문이다" 며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제1파 상륙정에 탑승하여 위에서 말했던 사진과 같은 역작을 남긴다. 그는 독일 낙하산 투하작전에 참가했을때도 제일 첫번째 비행기에 탑승하여, 제일 첫번째 뛰어내렸다.  

 

 

<독일 근교 낙하산 투하작전시 제일 먼저 투하된 후 찍은 사진. 대다수의 전사자가 낙하도중 독일군의 포격으로 전사했다. 그 자신 역시 비행기에서 뛰어내리라는 빨간 신호등이 켜졌을때, "미안해요, 난 못하겠어요" 라는 말을 삼켰다고 고백했을만큼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작전이었다. 로버트 카파, ⓒ Cornell Capa>

 

 

 

파에게는 공식적으로(?) 세명의 애인이 있었다.

첫번째 애인은 그가 너무도 사랑했던 여류사진가 게르다 타로였다. 하지만, 스페인 내전을 취재하던도중 탱크에 깔려 사망했다. 카파는 이때 너무 비통해했다고 한다. 근 보름을 두문불출 방안에 틀어박혀서 오열하고, 만나는 사람마다 게르다 타로 사진을 보여주면서 " 이 여자가 나의 부인이었다"고 말했다한다.

 

<로버트 카파와 그의 첫번째 연인 게르다 타로. 타로가 죽기 2년전인 1935년에 파리에서 찍은 사진이다. ⓒ Fred Stein>

 

 

 카파의 두번째 연인은 에라인 저스틴이었다. 하지만 카파는 에라인을 '핑키'라고 불렀다. 그녀의 머리색이 붉은색이 많은 금발이었기 때문이다. 사진은 구할수가 없었지만, 카파와 핑키는 헤밍웨이가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했을때 함께 문병가서, 헤밍웨이의 벗은 볼기를 가리키며 장난도 치곤하던, 아주 활달하고 매력적인 여성이었다. 이들 둘의 아파트는 당시 매일밤 파티와 포카판이 벌어졌다고 한다.

 

의 세번째 연인이 바로 잉그리드 버그만이었다. 당시 버그만은 유럽순회공연중 파리에 왔었는데, 카파와 어윈쇼가 리츠호텔 로비에서 버그만을 우연히 보게되었다. 그날 이들은 버그만에게 파티에 초대를 했고, 버그만은 놀랍게도 그 파티에 참석했다.

 

이들 둘은 몇주만에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잉글리드 버그만은 이때 유부녀였었다.

버그만은 카파에게, 전쟁터에서 돌아와 헐리웃으로 와서 새로운 일을 하며 자신과 함께 있어달라고 간절히 부탁했다. 이에 카파는 그녀의 부탁을 받아들여 헐리웃으로 와서 영화스틸사진을 찍는등 영화산업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곧 카파는 헐리웃의 상업적인 풍토에 기가 질려버리게 되었다.

 

<헐리웃에서 일할때 카파가 찍은 잉글리드 버그만 사진. 우측 카메라를 보고있는 사람은 히치콕 감독, 로버트 카파. ⓒ Cornell Capa>


 

 

이때, 버그만이 카파에게 청혼을 했다.

하지만 카파는 그 청혼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때 카파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나는 어딘가에 매여 살 수 있는 사람이 아냐. 내일은 한국이라고 하는 나라에 가야하는데, 내가 만일 결혼해서 아이가 있다면, 나는 한국에 갈 수 없겠지.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이때 카파가 한국에 오려고 했던건 물론 한국전쟁때문이었다. 결국 오진 않았지만.

아무튼, 카파는 자신의 일을 사랑했기에 그 일을 위태롭게 만드는 결혼을 원치않았고, 또한 버그만을 사랑했기에 그녀의 배우로서의 성공가도를 위태롭게 하고 싶지 않았던것같다.

 

훗날 버그만은 회고록에서 카파를 언급했다고 한다. 어느날 저녁, 그녀의 딸에게 카파얘기를 꺼내며 회고록을 건네주었다. 엄마를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말아달라고 하며. 그때 그녀의 딸은 "엄마에게 그런 멋진 애인이 있었다니 믿을 수 없어요"라며 웃었다고 한다...

 

1954년, 카파는 인도차이나 전쟁 취재를 위해 베트남으로 향한다. 

그가 삶의 최후의 순간을 맞이한 곳이다.

 

그날은 대인지뢰 작업이 있던 날이었다.

종군사진가 맥클린은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햇볕은 쨍쨍 내려 쪼였다. 사방에서 총성이 울리고 있었다. 우리들 뒤쪽에선 프랑스 대포소리, 탱크와 박격포소리, 왼쪽 숲속에선 소총소리, 오른쪽 마을에서는 포탄과 소총이 뒤섞인 소리, 박격포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너무도 위험한 상황이라 누구하나 주변을 서성거리기 힘들었다.

총성이 잠잠해지자 카파는 길옆 도랑으로 뛰어 들었다.

거기에서 그는 높게 자란 풀섶을 헤치고 전진하는 프랑스 소대의 사진을 찍었다.

그리곤 이동차량을 기다리며 천천히 걸어가는 군인들 사진을 두장 더 찍었다.

그것이 그가 찍은 마지막 사진이었다..

 

그리고, 다른 각도에서 군인들을 찍으려고 도랑위를 기어오르다가

대인지뢰를 밟고 말았다.

동료들이 폭발소리를 듣고 카파에게 달려갔다.

그는 왼쪽 다리가 잘려나가고 가슴은 파열됐다.

마지막 숨을 몰아쉬면서도, 카파는 카메라 끈을 꼭 쥐고 있었다.

동료가 카파의 이름을 불렀고..

그의 입술은 움직였지만,

아무런 소리도 듣지 못했다.

 

전쟁 - 그가 제일 증오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전쟁없인 살 수 없었다.

그의 나이 42였다.

 

<당시 카파의 카메라에 있던 필름 마지막 롤. 끝내 11컷을 넘기지 못했다..>

 

 

 

"만약 당신의 사진이 좋지않다면, 그건 당신이 충분히 다가서지 않았기때문이다" - Robert Capa.

 

충분히 먼저 다가섰던 작가, 로버트 카파(1913~1954)

 

 

 

뱀발...

 

로버트 카파 사진전이 5월달에 예술의전당 디자인미술관에서 열렸습니다.

아래는 로버트카파 사진전 몇컷입니다.

전시실 내부에서는 사진촬영이 가능합니다 (근접촬영 NO, 플래시 NO)

 

<사진아래: 디자인미술관 입구에 '미군장교와 전쟁고아' 사진이 걸려있네요>

 

 

 

<사진아래: 전시실 내부 D/P (물론 블로그 업로드 동의하에 촬영했습니다)>

 

 

 

<내부에 약30분간 로버트카파 다큐멘터리도 방영해줍니다>

 

 

 

<전시실 내부 DP>

 

 

 

 

<포토죤. 니콘에서 후원하고 있어서 이곳앞에서 기념촬영하면 무료로 사진인화해주네요.>

브람스 현악 6중주 1번 2악장(부제 :브람스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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